백화점 ‘식품관 전쟁’이 점점 치열해지고 있는 가운데, 지난 8월 21일 축구장 2개 넓이 규모의 현대백화점 판교점이 개장하면서 지각변동이 시작됐다. 최근 여성들 사이에선 SNS를 통해 “주말에 ‘현판’ 가자”는 유행어가 돌 정도다. 의(衣)에서 식(食)으로 문화 트렌드가 옮겨가고 있는 요즘, 고객들은 맛있는 디저트를 위해선 ‘한 입의 사치’를 마다하지 않는다. 신세계·현대·롯데백화점 3사의 식품관 바이어들이 주목하는 키워드는 2개다. 다른 백화점에는 없는 ‘세계 맛집’, 그리고 언젠가 한 번은 먹어본 친근한 ‘동네 맛집’. 치열한 백화점 식품관 전쟁 속을 들여다봤다.

오전 10시 30분. 백화점 문이 열리자 한무리의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처음엔 눈치를 보며 천천히 걸어오던 이들의 발걸음이 조금씩 빨라지더니 이내 달리기 시작한다. 이들의 목적지는 ‘매그놀리아’ 매장. 미국 HBO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시리즈에 등장했다는 뉴욕의 컵케이크 집이다. 개점 5분도 안 돼 지하 1층 매그놀리아 매장 앞에는 100여 명의 사람들이 줄을 섰다. 현대백화점 판교점의 평일 아침 풍경이다.

바겐세일도, 공짜 사은품도 아니고 단지 컵케이크를 사기 위해 줄을 서는 진기한 모습이 최근엔 그리 낯선 풍경은 아니다. 일본 오사카의 명물 도지마롤 케이크와 망치로 깨서 먹는 독일 전통과자 슈니발렌이 신세계 백화점에 입점했을 때도 같은 상황이 연일 벌어졌다.

고객을 백화점까지 오게 만드는 데 먹거리는 그만큼 중요한 동기가 됐다. 식품관에서 식사하고 기분이 좋아진 고객들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천천히 상층으로 이동하며 쇼핑을 즐기도록 유도한다는 마케팅 기법, 이름하여 ‘분수효과’다. 반대로 백화점 꼭대기에 있는 식당가에서 식사를 하고 아래쪽으로 이동하는 ‘샤워효과’도 있다. 그러다보니 아예 층 중간 중간에 카페를 둔 곳이 많이 눈에 띈다. 간단하게 차 마시러 들렀다가 옆에 있는 진열 상품에 눈이 가도록 한다는 전략이다. 최근 롯데백화점 본점 4층에는 크루아상으로 유명한 프랑스 베이커리 콘트란 쉐리에가 입점했다.

차별화와 유일함 내세운 ‘세계 맛집’ 전략
“의류나 화장품 등은 다른 백화점에도 똑같이 들어가 있는 게 많으니까 우리만의 차별화된 상품을 갖추는 게 중요합니다.”

현대백화점 공산품팀 최혜민 바이어의 말이다. 그래야 “00백화점에서 00을 먹다”라는 글과 사진을 함께 올리는 SNS 입소문 덕을 볼 수 있다.

개점 20일이 지난 현대백화점 판교점의 경우 국내 첫 진출한 ‘매그놀리아’ 효과는 대단하다. 어린아이 주먹만 한 빨강·파랑·노랑 색색 컵케이크의 1일 평균 매출은 2000만원. 매장 앞에는 심지어 ‘레드벨벳 컵케이크와 바나나 푸딩은 1인당 1개씩만 판매합니다’라는 안내문까지 적혀 있다. 같은 드라마에서 주인공들이 브런치를 즐겨 먹었다는 레스토랑 ‘사라베스’ 역시 백화점 개점 직후 수십 석의 자리가 이미 꽉 찼다. 이곳의 인기 메뉴는 빵 위에 달걀 반숙을 올리고 녹인 치즈를 얹은 ‘에그베네딕트’. 주문 후 15분~20분을 기다려야 하지만 손님들은 개의치 않는 눈치다.

현대백화점 판교점만의 먹거리는 이 외에 덴마크의 유명 주스브랜드 ‘조앤더주스’가 있다. ‘훈남 오빠들’이 갓 짠 과일 주스와 샌드위치를 먹을 수 있다. 이탈리아 전역의 장인들과 연계해서 상품을 판매하는 마켓&레스토랑 브랜드 ‘이탈리’도 이곳에서만 만날 수 있다.

다른 백화점들도 자신들만의 먹거리를 내세우고 있다. 롯데백화점 본점에는 치즈 타르트 ‘파블로’, 프랑스 베이커리 ‘콘트란 쉐리에’가 있고 잠실점에는 일본의 푸딩 전문점 ‘토로로’와 이탈리아 럭셔리 마켓 브랜드 ‘펙’이 있다. 신세계백화점 본점에는 미국 팝콘 브랜드 ‘갸렛팝콘’, 프랑스 초컬릿 브랜드 ‘라메죵뒤쇼콜라’, 70년 전통의 이탈리아 브랜드 ‘빈디디저트’가 입점했다.

친숙함과 익숙함 공략하는 ‘동네 맛집’ 전략
백화점 ‘식품관 전쟁’은 최근 새 국면을 맞고 있다. 디저트가 발달한 프랑스와 일본에서 수입하던 브랜드만으로는 더이상 차별화된 전략을 갖추기 어려워졌다. 실제로 몽슈슈, 슈니발렌은 고객이 몰리자 다른 백화점에도 입점했다. 처음부터 두 개의 백화점에 들어서는 경우도 생겼다. 80년 역사를 가진 일본의 차게 먹는 크림빵 ‘핫텐도’는 신세계와 롯데에 나란히 입점했다. 핫텐도 대표가 두 백화점 바이어의 열의와 경쟁을 보고 한 쪽 손만 들어주었다가 다른 한 쪽 바이어가 회사에서 곤란해 질까봐 내린 결정이라는 후문이다.

이렇다 보니 수입 브랜드 외에 국내 ‘동네 맛집’을 유치하려는 경쟁도 치열해졌다. 작년부터 앞다투어 리뉴얼하는 식품관 매장에는 이태원·경리단길·홍대앞·가로수길에 있는 맛집들의 2~3호점이 입점하기 시작했다. 신세계에는 오뗄두스·빌리엔젤·밀크·반피타이가, 현대백화점 판교점에는 프랭크베이커리·연화방·마이타이·마이쏭·백미당·무자초 등이 운영중이다. 신세계백화점 식당가 바이어 박대업 과장은 “서울 시내 곳곳에 흩어져 있는 맛집을 한곳에 모아놓으면 고객이 여러 날에 걸쳐 각각의 식당으로 찾아갈 발길이 백화점으로 향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지방에 있는 오래된 동네 맛집이 상경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현대백화점 판교점에서 매그놀리아 다음으로 인기가 높은 곳은 ‘삼진어묵’이다. 1953년 부산에서 시작된 삼진어묵은 ‘부산어묵’이라는 말이 고유명사처럼 쓰이는 부산에서도 대표격으로 꼽힌다. 57년 대구 남문시장에서 문을 연 ‘삼송빵집’은 3대째 운영되는 곳으로 옥수수알갱이가 수북이 들어간 ‘마약옥수수빵’과 소보로단팥빵으로 유명하다. 1905년 자장면을 처음 개발한 공화춘 초대 사장의 외손녀 왕애주 여사가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인천 차이나타운의 ‘신승반점’도 들어왔다.

작년 5월부터 롯데백화점 잠실점에서 영업중인 군산 ‘이성당’도 빵 나오는 시간에 줄이 길게 서는 집으로 유명하다.

본점에는 송탄에서 ‘마약짬뽕’으로 소문난 ‘영빈루’가 들어와 있다. 가늘게 썬 돼지고기와 오징어를 말렸다가 육수 고명으로 얹어내는데 국물 맛이 아주 진하다. 영빈루에서 만난 이영숙(56)씨는 “지방에선 자장면 위에 달걀 프라이를 얹어주는 데가 많은데 서울에선 좀처럼 볼 수 없었다”며 “오랜만에 옛날 생각하며 맛있게 먹고 있다”고 했다.

언젠가 먹어본 ‘맛집의 기억’에 주목
맛은 기억에 많이 좌우된다. 처음 먹는 색다른 음식에 놀라기도 하지만 여행 중 또는 어린 시절 먹어봤던 맛을 다시 한 번 경험하고 싶다는 향수는 감동까지 선사한다. 백화점 식품관이 친숙한 동네 맛집에 주목하고 있는 이유다.

롯데백화점 델리카 황슬기 수석바이어는 “온라인 블로그와 SNS를 통해 국내 곳곳의 맛집을 찾고 이들 중 ‘3대 맛집’ ‘5대 천왕’ 같은 수식어가 붙은 집들을 찾아다니며 직접 맛을 보고 서울 입성을 고민한다”고 했다.

바이어들은 한 달에 3~4회씩 지방을 훑고 다니지만 아직까지 백화점에 들어온 지방 동네 맛집 수가 그렇게 많지는 않다. 서울 진입이라는 ‘욕심’을 부리다 지금까지 쌓아온 아성이 무너질까 걱정하는 장인들이 많기 때문이라고 황 수석바이어의 귀띔이다. 무엇보다 지방 맛집은 그 지역의 특성화된 재료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을 서울까지 매일 공수하자면 물류비용이 만만치 않다. 또 전문 인력도 두 개 팀으로 나눠야 하기 때문에 자칫 본점 운영까지 차질이 생길 수 있다.

현대백화점 최혜민 바이어는 “하지만 꼭 입점시켜야겠다 마음 먹으면 ‘십고초려’도 마다하지 않는다”며 “삼진어묵의 경우 담당 바이어가 관계자 결혼식 행사까지 챙겨가며 정성을 다했다”고 했다. 고객들로선 백화점에 가는 일이 새롭고 맛있어졌다. ●